예전에 한 선배 정형외과 교수님의 이분척추증 보호자 설명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날 교수님은 수술하는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수술하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 마음을 참는 것이 실력이라고 하셨다. 수술이 잘못되거나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까지 생각하면, 수술이라는 선택을 아껴두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방광요관역류 환자들을 떠올렸다. 질환도 다르고 수술을 미루는 이유도 같지는 않지만, 보호자 앞에서 "수술합시다"라는 말을 꾹 눌러 담는 마음에는 공감이 갔다.
역류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외래에 오는 보호자의 답답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시 열이 나지는 않을지, 요로감염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기다리는 동안 콩팥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 진료 날짜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검사 결과를 듣고도 뚜렷한 결론 없이 다음 외래 날짜를 잡아 돌아가야 한다면, "조금 더 지켜봅시다"라는 말이 충분한 답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의사가 얼마나 재고 망설였는지는, 진료실 밖에서는 알기 어렵다.
나에게도 수술해서 빨리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 불확실한 상태를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 오래 익힌 술기를 제대로 써 보고 싶고, 잘 해낸 결과를 보여주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수술은 병원과 의사의 수입에도 연결된다. 보호자의 불안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까지 더하면, 수술을 권하는 쪽으로 기우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 그 이유들에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운데 놓고 다시 세어 보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지금 이 아이에게 이 수술이 필요한가.
역류 수술을 권하지 않는 이유가 언제나 실패에 대한 걱정인 것은 아니다. 특히 요관방광재문합술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수술이고,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고려할 수 있는 방법들도 있어 그날 강의에서 들었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성장하면서 좋아질 가능성이 있는 아이에게 지금 수술이 주는 이득이 충분한지, 마취와 회복의 부담까지 감수할 필요가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수술을 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수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별개다. 수술하지 않아도 될 아이에게 수술을 하지 않는 것 역시, 수술하는 의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관찰을 권하지만, 그 선택이 늘 편안한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는 기다리면 좋아질 것이고, 어떤 아이는 감염이 재발할 것이며, 어떤 아이는 결국 수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 앞날을 모두 알 수 있다면 결정도 설명도 훨씬 쉽겠지만, 그런 의사는 없다. 검사와 지금까지의 경과를 바탕으로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뿐, 가능성이 곧 확실한 미래는 아니다. 관찰을 권한 뒤 감염이 생길 수도 있고, 수술을 권했던 아이가 조금 더 기다렸다면 좋아졌을 수도 있다. 때로는 수술로 빨리 결론을 내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내가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과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치료를 구분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 불확실함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던 밤이 있다. 고민 끝에 "한 번만 더 기다려 봅시다"라고 말하고, 예방항생제를 처방하며 추적을 권했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새벽 한 시에 응급실로 왔다. 검사 결과는 패혈증을 의심하게 했다. 나는 그날 당직을 서고 있었고, 전공의도 없는 밤이라 몸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아이와 보호자를 마주하자 피로에 미안한 마음까지 겹쳐졌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던 내 말을 믿고 돌아갔을 보호자를 생각하니, 그때 수술을 권했다면 오늘 밤은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피하기 어려웠다.
감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이전의 판단이 잘못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의 상태가 걱정됐고, 보호자에게 미안했고, 그러면서도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관찰을 권할 때 이야기했던 가능성이, 그 밤에는 눈앞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관찰을 권하는 일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진료실에서 결정을 내리고 하루를 마치는 동안, 보호자는 집에서 아이의 이마를 짚어 가며 그 시간을 보낸다. 기다리기로 한 뒤의 시간을 매일 살아내는 쪽은 아이와 보호자다.
그래서 "기다려 봅시다"라는 말을 할 때는 왜 기다리는지뿐 아니라, 그동안 무엇을 확인하고 어떤 상황에서 병원에 와야 하며 경과가 달라지면 무엇을 다시 논의할 것인지까지 설명하려고 한다. 설명을 충분히 듣고도 보호자의 불안은 남을 수 있고, 나 역시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다. 다만 처음 관찰을 권했다는 이유로 같은 판단을 계속 붙들고 있지는 않아야 한다. 수술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는 것만큼, 기다리자고 했던 결정을 다시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진료실에서 그 말을 꺼내기까지 고민하고, 다음 진료에서 아이를 만날 때 다시 고민하는 것까지가 관찰을 권한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